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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ement 

2025/08/01 

이별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와 삶을 뒤흔드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마음을 줬던 관계들과 이별하는 것이 유난히 어렵게 느껴진다. 삶에서 겪게 되는 예기치 못한 이별이 하나 둘씩 늘어나며 어느순간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겼다. 내게 의미있는 것들이 그 무엇도 영속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이 점점 부풀어올라 나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가 되는 순간이면 나는 과거의 기록들에서 얄팍한 위안을 찾는다. 지인과 나눴던 문자메세지나 오래된 구글 드라이브계정에 저장된 사진을 뒤져보기도 하고, 나한테 중요했던 장소들의 흔적을 찾아 인터넷에 검색한다. 삶의 한 시점에서 소중했으나 영원히 떠나보낸 대상들에 대한 기록과 기억은 내 작업의 출발점이 되곤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이러한 기록들이 마치 무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쌓인 사진과 영상, 문자와 기록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무언가의 남아있는 잔재처럼 애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현재의 내가 물리적으로 위치한 시간과는 별개로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각기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라는 어려움을 털어놓자 가까운 친구는 그래도 붙잡고 있는 기억들이 좋은 기억들이라 다행이라는 위로를 전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좋은 기억들조차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얽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정신은 과거를 배회하고 있는 느낌은 작년 봄에 있었던 개인전 《No Point of Contact》(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4)을 준비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이 전시에서 나는 동일한 20개의 레이어를 112개의 캔버스에 변주한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다> (2022-2024) 회화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강박적인 회상에 가까운 과정을 통해 특정한 기억에 닿으려는 시도였지만, “No Point of Contact” 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결국 과거의 시간은 닿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떠나버린 소중한 대상들과 지금도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다 유독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과거와 현재가 나를 반대로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시간의 냉정한 경계 위에 서 있다고 느꼈고,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강렬한 감각적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과거에 멈춘 흔적들이 작업으로 옮겨지며 현재를 만나고, 두개의 서로 다른 시간 축이 화면위에 하나로 겹쳐지며 진동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기억을 반복하고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에서 빛나는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우리는 지나쳐온 시간을 어떻게 회고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올해 여름에 발표한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홀원, 2025)에서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욕망보다는, 깨진 벽면, 갈라진 바닥, 부식된 표면과 같이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흔적들을 조용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디지털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장소에서 찾은 흔적들을 작업에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여러 도시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바탕으로 패턴을 추출해서 이를 드로잉과 회화에 사용했다. 파편같은 과거의 흔적들이 모여 하나의 장면, 하나의 기억을 구성한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듯 흐릿하다가, 생각해보면 상세한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가, 결국 다시 어렴풋한 정서와 감각으로 흩어져버린다. 밀물과 썰물처럼 끝없이 생성되고 연결되는 상념들을 사슬처럼 화면에 엮는다. 이미지의 색상과 명도, 채도를 미묘하고 미세하게 조정해서 멀리서 봤을 땐 색의 덩어리가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선과 형태가 하나 둘 드러난다. 산산이 조각나고 부서진 시간의 편린을 성글게 모아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얽히며 고요히 진동하는 것 같은 감각을 전달하려고 했다. 붓을 들고 캔버스를 만날 때, 과거의 기록들을 다시 살펴보고 재해석 하고 내가 이해가능한 이미지로 조립할 때, 그 과정에서 나는 지나간 순간을 수용하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같기 도 하다.

매 시기별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짐에 따라 내 작업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가 경계가 닫힌 도형,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하드엣지 기법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실과 부재의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하드엣지라는 표현방식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동안은 기억이 디지털로 기록되며 데이터화 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하드엣지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단단한 외피로 감싸서 잃어버리는 것을 막고 싶은 표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속적인 색의 이어짐을 끊고, 쪼개고, 구획을 나누고, 하나의 단단한 테두리 안에 색을 안전하게 가둔다. 마치 그런 행위가 영원을 담보할 것 같기라도 한 것처럼. 쉽게 날아가버리는 연약하고 가벼운 것들을 얇고 견고한 막으로 감싸고, 설령 그 안에 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남아있는 단단한 테두리가 한때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거라고 위안한다. 

Essay

2025/05/28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헤맬 때, 아직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던 시간을 상상한다. 처마 밑에서는 제비가 분주하게 아침을 알리고, 작은 아빠는 눈 덮인 무등산 산책로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고, 정원이는 에버랜드 그 어느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상상을. 아빠의 무릎은 유연하게 구부러져 산악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고, 잠시 쉬어갈 때면 나무에 기대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던 상상을. 아직 아무도 무엇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았던 순간을.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정원이는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우리는 에버랜드에 함께 놀러 갔다. 그곳에서 정원이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 흰 전구가 많이 켜졌던 흰 방에서 잃어버렸던 정원이를 다시 찾았다. 정원이가 죽은 날 엄마, 아빠는 급하게 광주로 내려갔다. 나는 혜정 이모와 함께 서울에 남았다. 컴컴하고 조용한 베란다 너머로 군데군데 가로등이 켜진 어두운 길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에버랜드에서 잃어버린 정원이를 다시 찾은 것처럼, 어디선가 정원이를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해 5월이면 연희 이모는 섬진강을 찾는다. 산기슭에 조용히 앉아 말없이 강을 바라본다.

3살 이전에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아빠는 두 무릎을 굽혀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사고를 기점으로 3살 이후의 사진에서 아빠는 한쪽 다리를 뻣뻣하게 편 채 내 뒤에서 그네를 밀어 주고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크면 아빠의 일직선 다리도 구부러질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올해는 아빠의 환갑이었다. 아빠의 머리엔 점차 흰색이 늘어가는데 아빠의 다리는 여전히 단단하게 땅과 수직을 이루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한 번 부서진 것은 영원히 부서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서진 파편을 껴안고 한 발, 또 한 발을 기우뚱기우뚱 나아갈 뿐이라는 것을.

아빠는 나를 비행기 격납고처럼 생긴 콘크리트 공장들이 배열되어 있던 장소로 데려갔다. 버섯농장을 지을 부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여기가 아빠의 꿈의 궁전이 될 거야.” 아빠는 말했다. 파이프들이 나름의 질서를 따라 격자무늬를 이루며 어지럽게 지나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이곳에 작업실을 차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스치듯 해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뒤, 아빠가 자신이 지었던 꿈의 궁전에서 쫓기듯 떠나야 했을 때 나는 벽에 걸린 캔버스를 바라보며 슬픈 안도를 느꼈다. 이 네모난 세계 속에 있는 내 꿈의 궁전은 안전할 거라고.

그 순간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 깨달음은 그때의 그 순간이 영원히 지나쳐버린 순간이라는 점에서,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온다. 눈이 많이 내렸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빠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작은 아빠와 함께 올랐던 무등산의 하얀 설원에서 뒤로 구두를 미끄러뜨리며 내려오던 작은 아빠와의, 내가 기억하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 그러하다. 그 순간이 유독 뇌리에 박힌 것은 그때의 그 겨울 무등산 산행 얼마 뒤 작은 아빠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까.

그 해 한여름의 베니스는 뜨거웠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민하와 매일같이 걷고 먹고 자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유하며 오랜만에 아주 깊은 연결감을 느꼈다. 여행이 끝나고 나는 베니스로, 민하는 다른 도시로 향했다. 헤어진 직후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베니스에 도착한 후 갑작스러운 공허가 엄습해 왔다. 어느 미술관에서 주황빛 색들에 눈이 부셨던 순간을 지나쳐 딱 그만큼 외로워진 찰나였다.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다 근처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나의 시간이 또다시 끝나버렸고, 무언가가 완전히 지나가버려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완결된 시간이 되었음을 생각했다. 

미술관을 나서서 한 걸음 내디딘 길거리는 무덥고 찝찝한 습기로 혼탁했다. 하늘을 보기엔 너무 지쳤던 것 같아서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벽면이 깨지고 보수되기를 몇백 년 동안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균열의 흔적들, 물이 차오르고 빠지고를 반복하며 생긴 바닥의 물결무늬 흔적들. 한 시간을 통과하고 다른 시간이 막 시작되려는 시간과 시간의 틈 사이에 있었기 때문일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흔적들이 유독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Statement

2024/01/14

오랫동안 나를 관통하는 하나의 추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이별과 상실에 대한 불안이었다. 시간과 나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나는 시간의 단일한 움직임과, 그에 단단히 고정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을 망연히 지나치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하늘의 색이 바뀌고 낮과 밤이 바뀌고 때론 영원히 멈추고 싶은 순간들이 눈 앞에 펼쳐지지만, 결국 풍경은 스치고 사람은 떠나며 나는 속절없이 밀려가고 또 밀려간다. 앞으로, 또 앞으로. 꾹 참고 눌러놓았던 그리운 마음들이 쌓여 지나쳤던 감정들이 불쑥 찾아올 때면 작고 성긴 그물을 던진다. 현실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의흔적을 찾아,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이나 영상 또는 예전에 내가 올렸던 인터넷의 유물같은 포스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과 한때 가까웠고 중요했지만 이제는 건조해진 관계와 사람들에 대해 어렴풋이 회상하며 화면 위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정확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한 직감을 안고 화면 위에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네모나고 선명한 빛무리를 바라보곤 한다. 
 
시간이 떠나간 자리엔 마음속의 풍경이 남지만, 풍경은 빠르게 풍화되어 뼈대만이 남는다. 대부분의기억에서 이 뼈대마저 이내 흐릿해지다 종국엔 소멸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나쳐왔음을 알지만 떠나보낼 수가 없어 자꾸만 배회하게 되는 몇몇 순간들이 있다. 이때의 풍경을 떠올리기 위해 여러번 반복해서 시도하지만, 뼈대를 둘러싼 세부적인 부분들이 매번 조금씩 달라지며 얼핏 유사하나 미묘하게 다른 풍경들이 탄생한다. 나무의 개수는 2개에서 4개로, 다시 3개로, 해의 위치는 정면에서 왼쪽으로, 또 맞은편으로. 시간속에서 스쳐 지나간 그 풍경과 꼭 닮은 것을 만들고 싶지만 잃어버린 그것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비슷한 풍경들을 무수히 많이 만들고 만다.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다>는 내가 부질없이그리워했던 어떤 한 순간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유튜브의 영상을,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나의 개인사진첩을 들쳐보던 기나긴 밤의 여정을 떠올리며, 원형적인 기억의 풍경에 도달하기 위한 밀물과 썰물처럼 끝없이 생성되고 연결되는 수 많은 시도들을 기억의 사슬처럼 엮어보고자 했다. 
 
기억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의 역할을 하는 20개의 레이어는 모든 시도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기억을 재구성 할 때마다 핵심적인 키워드를 둘러싼 부분이 달라지는 것처럼 레이어의 크기와 위치, 개수가 매번 달라진다. 특정한 기억의 풍경에서 출발했지만, 보다 보편적으로 내가 감각하는 기억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사실적인 이미지를 배제한 추상의 방식을택하게 되었다. 
 
작업에서는 기하학적 도형이나 선, 특히 딱 떨어지는 정확한 테두리가 안과 밖의 경계를 명확하게구분짓는 닫힌 도형만을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확정적이나 동시에 매우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기억의 재구성처럼, 선명하고 단호한 것들을 여러번 겹치고 엉키며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중간적인 상태를 만들고자 한다. 모든 기억의 풍경에는 외부세상과 그 세상을 감각하는 내가 있고, 캔버스의 네모난 질서에 맞춰 수직과 수평으로 안착하는 직사각형 도형들이 배경을 만든다면 꾸물꾸물 기어가는 선이 그것을 하나의 총체적인 덩어리로 엮는다. 
 
기억의 뼈대를 따라 1번 레이어부터 마지막 20번 레이어까지 잃어버린 풍경을 착실하게 재구성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끝이 나면, 다시 새로운 캔버스에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한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가 늘어날 수록 그것과 닮은 풍경들이 늘어나 총 112개의 그림이 되었다. 자꾸만 기억을같게 또 다르게 되뇌이다보면 그 기억은 더욱 소중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서서히 잊혀지는 것일까. 112개의 시도들에 좌표를 부여해 이들이 전체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완결된 풍경들의 집합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시도에서 다음의 시도로, 또 그 다음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실패의 시도들이 계속해서 연결되며 좌표계를 확장해간다.

Statement

2022/06/10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매일이다. 아니다, 잠에 들기 싫은 밤이 계속이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사용한다. 아니다, 내게는 사용이라는 단어에 짙게 깔린 특정한 의도와 목적성이 부재한다. 작은 화면에 언어와 숫자, 이미지가 끝없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보지만 강렬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시공간의 구획을 벗어나 불쑥불쑥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무언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만 같은 것을 찾아 헤매인다. 아마도 그것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결핍을 애써 잊으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한 희망과 애잔한 마음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오른손 엄지로 화면을 기계적으로 스크롤 한다. 자동으로 켜지는 “Do Not Disturb” 기능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체의 연락을 차단해주고, 나는 소통을 자발적으로 거부한 채 누군가 디지털 세계에 남겨놓은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을 은밀히 지나친다. 대략 30초, 길어야 1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영상들과 단편적인 이미지의 조각들을 넘기고 또 넘긴다. 화면 위엔 계속해서 무언가가 떠오르고, 고정되지 않으며 표류하는 것들은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면, 화면에서 보는 이미지들은 내가 느낀 불안의 형태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다음날,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지난밤의 궤적을 따라가본다. 스치고 지나간 시각적 자극을 되짚어보지만 개별적인 이미지와 영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흐릿하다. 대신 빠르게 점멸하다 스믈스믈 이동하며, 부지불식간에 증식하는 것들에 대한 인상만이 떠오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들과 어둠속에서 핸드폰 화면의 네모난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희뿌연 빛무리에 대한 어렴풋한 잔상. 뭉게진 빛 덩이와 같은 잔상으로 남은 것들을 분해하고 해체하며, 그 속성을 분석하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다시 한번 조립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는 상상력에 고삐를 매어 현실의 중력에 단단히 옭아매기 마련이다. 화면 너머의 세계가 가진 비현실적인 공간성을 생각해보면, 이를 재구성하기 위해선 보자마자 무엇이 떠오르는 이미지들보다 기하학적 형상들과 추상 패턴이 역시 좋겠다. 얇은 파편들과 비슷한 조각들을 겹겹이 쌓아 길을 만들고, 이들을 곧 다른 크기와 색깔로 변주한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칠하고 흩뿌린 끝에 원점 (0,0)으로 사용될 하나의 캔버스가 완성된다. 이를 기준으로 위아래, 오른쪽과 왼쪽에 새로운 캔버스들을 연결해 동일한 규칙 아래 칠하고, 뿌리고, 겹치고, 잇고, 지우고, 연결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한다. 흐릿한 잔상과도 같은 이미지가 순환하듯 프레임 밖으로 생성되는 화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2019-2020년에는 화면 너머 무한한 가상공간이 화면에 디스플레이 되며 납작한 벽과 같은 평면공간으로 나타난 점에 착안한 작업을 했다. 화면 너머의 세계는 현실의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처음도 끝도, 중심도 가장자리도 없는 무한한 공간. 시스템과 논리회로에 의해 구축된 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들은 쉴 새 없이 나열되고 서로서로 충돌하며 무수히 겹쳐지고 나타나고 사라지며 스르륵 흘러간다. 이들은 본래 속한 세계 안에서는 든든한 무게감을 가지며 올록볼록 튀어나오지만, 그물에 잡혀 액정 위에 펼쳐질 땐 그 단단한 유리 평면 위에 찰싹 붙어 납작해진다. 나는 종이장처럼 평평해진 것들을 가지고 그들이 그물에 잡히기 전에 있었을 공간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화면 너머 내가 헤매던 공간이 무엇인지, 길을 정돈하고 구획을 나누며, 나의 흔적을 추적해 무의식에 자리잡은 시공간의 기억에 따른 서사를 되짚었다. <What I See in My Windows>시리즈에서는 공간을 구성하는 파편적인 정보들이 위로, 아래로, 양 옆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 <&>, <#>, <%>, <*> 를 원형으로 둥글게 이어지게 구성해서 처음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비선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2021년부터는 공간의 재구성보다는 기억 속에 남은 잔상에 집중하고 있다. 에어브러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해 각 이미지의 투명도를 다양하게 조절해 이미지가 쌓이고 겹치는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캔버스 하나하나가 모듈이 되어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고, 2차원 그래프의 벡터 시스템을 작품의 제목에 적용해 공간의 좌표를 부여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Essay

2020/12/09

변화를 맞닥뜨릴 때 이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수용한다 2) 거부한다. 하지만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기까지 말하지 못한 것들은 무엇일까? 1과 2 사이 의 무수한 소수? 1이 되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2? 혹은 1과 2 사이에 어정쩡하게 존재하는 1 또는 2?
 
나는 디지털 기기의 화면에서 무언가를 보는 경험이 회화를 둘러싼 시지각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흐름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를 마주하는 나의 태도를 곰곰이 반추해보면, 결국 나는 1도 2도 선택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나는 디지털 이미지의 선명한 미감과 다채로운 색상을 좋아하고, 날카롭게 떨어지는 미감을 동시대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디지털 이미지가 미처 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회화를 만들고 감상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점차 변화하고 때로는 완전히 대체되는 것을 시대의 필연적인 변화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한다. 매끄럽고 단단한 액정 위에 떠오른 이미지를 볼 때, 캔버스에 팽팽하게 당겨진 부드러운 천의 질감과 붓의 압력에 의해 뭉쳐진 물감의 두께와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이것이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 되고 액정에 매개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에 괜스레 마음이 쓰인다. 그러니 어쩌면 1과 2 중 하나를 다른 것의 우위 에 둘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구별이 무의미해질 만큼 점점 더 엉키고 설켜가는 현 상황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내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은 일견 관념적인 것으로, 이것이 기계적이고 차갑다는 것이다. 기계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처럼, 명확한 입력값을 바탕으로 작동하며 모호하 거나 애매한 값은 출력의 오류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입력한 그대로 출력이 되는 것을 보면 서 나는 디지털은 현실 세계의 지저분함, 예측 불가능함,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등과 반대되며, 자로 잰 듯한 정밀함,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엄밀함, 단순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내가 디지털 기술에 대해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실제로 접하는 디지털 가상공간은 흥미로운 정보와 이미지 들이 넘쳐나는 매혹적인 곳이다. 전세계의 이용자들을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나는 자발적인 참여자로서 나의 시간을 즐겁게 할애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화면 위에 무작위로 떠오르는 영상이나 이미지, 텍스트 는 예상치 못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하며, 뜻밖의 오류와 같은 것들이 발견되어 이미지가 깨지거나 엉뚱한 링크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결국 내가 디지털 가상공간에 대해 가진 인상은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공존하는데, 디지털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뼈대가 되는 기술은 기계적 정확성과 논리적 연산에 바탕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공간을 구성하는 대상은 유쾌하고 예기치 못하며, 엉뚱한 재미가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나는 일정한 규칙성과 기계적인 반복성을 가지면서도, 그 안의 대상들이 우연하게 관계하며 만들어내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공간을 표현하고자 한다. 주도면밀한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말이다. 나는 새로운 네트워크와 데이터가 추가됨에 따라 계속해서 팽창하는 디지털 가상공간의 확장성을 상상하고, 논리적이고 수리적인 방법에 의해 구축되는 구조를 떠올린다. 이 공간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은 공간을 둥둥 떠다니며 부유하며, 반복되고 변주되며 무수히 많은 이미지로 늘어난다. 이미지들은 공간을 구축하는 일종의 논리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지만, 동시에 예기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며 의외의 장소에 위치할 때도 있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위치에 갑작스럽게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Essay

2019/12/04

한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은 일정한 조건 값이 필요하다. 세계를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좁은 의미로 규정하면, 하나의 물리적 세계에서 다른 물리적 세계로 가는 것은 목적지에 따라 이동성이 달라지는 조건이 필요하다. 세계의 개념을 보다 확장시켜 비물리적 공간까지 포함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 세계나 관념 세계로 떠나기 위해선 일반적으로 조용한 곳을 찾아 눈을 감고 집중하는 등의 특정 조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전원이 공급되는 환경에서 일련의 비밀번호나 개개인의 고유한 생채 정보를 이용해 잠겨있는 화면을 풀고, 인터넷이나 데이타에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조건 값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와 같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컴퓨터나 핸드폰의 디스플레이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를 통해 접하는 공간이 내가 있는 현실 공간과는 다른 세계임을 뜻한다.
 
그러나 세계라는 것은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며, 방대한 영역의 극히 미약한 일부만이 내가 경험하는 것을 토대로 선별적으로 주어질 뿐이다. 한 세계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오직 내가 발 디딘 곳에서 경험하는 것을 토대로 세계의 나머지를 추측한다. 내가 바라보는 디스플레이는 기껏해 야 4인치 혹은 13인치 액정에 불과하다. 이 화면이 담을 수 있는 것들은 결코 방대한 사이버스페이스의 완전한 총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것들을 바탕으로 그 너머의 거대한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이 내게 가능한 행위일 것이다. 이는 망망대해에 어망을 던져 그 안에 잡힌 것들을 바탕으로 바다의 나머지 부분을 막연하게 상상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그물에 잡힌 것들이 아니라 잡히지 않은 것들이다. 즉,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어망 속에 잡힌 물고기들 이 아니라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 물고기의 치어나 플랑크톤이나 바닷물 같은 것들이며, 그물이 미처 훑고 지나가지 못하는 지역과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심해와 같은 것들이다. 디스플레이 너머의 세계란 이처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거대한 가능성의 총체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건져올리고 채집하는 행위를 바탕으로 그 외의 것들을 상상하며 유동적인 공간을 재구성한다.
 
지금까지 내 뜰채에 담긴 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은 지금처럼 고해상도의 그래픽이 발달하기 이전의 픽셀과 글리치로 깨지던 그래픽, CRT 모니터를 사용하던 시절 화면의 수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던 스크린 세이버의 밝고 경쾌한 색감, 3D 모델링의 하이퍼리얼리티적인 매끄러운 명암, 전자회로를 연상시키게 하는 기하학적인 패턴 등이다. 이것들은 이들이 속한 본래의 세계 안에서는 올록볼록 튀어나오고, 겹치고, 무수히 중첩되고, 나타나고 사라지며 스르륵 흘러가는 특징을 가졌지만, 끌채에 담겨 디스플레이 위에 펼쳐질 땐 이 단단한 유리 평면 위에 찰싹 붙어 납작해진다.
 
공간감과 입체감이 평면으로 나타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표현하는데 회화는 적합한 매체이다. 3차원의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대상들과 교환될 수 없는 물리적인 앞뒤 관계에 있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앞에 위치한 대상이 가장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각적 착시가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회화에서는 물리적 레이어와 시각적으로 인식되는 레이어의 순서를 뒤엉키게 만들고 시각적 착시가 환영을 일으켜 평면에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하학적 패턴이 캔버스의 평면과 수직성을 강조한다면 그것들의 겹쳐짐은 공간감을 암시한다. 또한 둥둥 떠다니는 구들의 매끄러운 표면은 캔버스 평면에 달라붙어 구라는 물체가 가진 본능적인 입체성과 상충한다.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나는 디스플레이 너머의 공간을 회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우연히 조합하는 색이나 형상, 또는 삐죽 튀어나온 보풀 같은 붓 자국이나 슬쩍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 같은 것들은 내가 그려내는 것들이 단순한 모방적 재현이 되는 것을 막아준다. 미리 결정된 전체를 실행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제약들과 문제점들이 최종 결과물을 미리 정확히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시작점과 끝이 달라지며 그 사이의 존재하는 간극의 넓고 좁음 사이를 진동하며 평행점을 가늠한다.

© 2022 by Koeun Gwen S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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