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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e/Statement
2025/08/01
이별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와 삶을 뒤흔드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마음을 줬던 관계들과 이별하는 것이 유난히 어렵게 느껴진다. 삶에서 겪게 되는 예기치 못한 이별이 하나 둘씩 늘어나며 어느순간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겼다. 내게 의미있는 것들이 그 무엇도 영속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이 점점 부풀어올라 나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가 되는 순간이면 나는 과거의 기록들에서 얄팍한 위안을 찾는다. 지인과 나눴던 문자메세지나 오래된 구글 드라이브계정에 저장된 사진을 뒤져보기도 하고, 나한테 중요했던 장소들의 흔적을 찾아 인터넷에 검색한다. 삶의 한 시점에서 소중했으나 영원히 떠나보낸 대상들에 대한 기록과 기억은 내 작업의 출발점이 되곤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이러한 기록들이 마치 무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쌓인 사진과 영상, 문자와 기록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무언가의 남아있는 잔재처럼 애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현재의 내가 물리적으로 위치한 시간과는 별개로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각기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라는 어려움을 털어놓자 가까운 친구는 그래도 붙잡고 있는 기억들이 좋은 기억들이라 다행이라는 위로를 전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좋은 기억들조차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얽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정신은 과거를 배회하고 있는 느낌은 작년 봄에 있었던 개인전 《No Point of Contact》(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4)을 준비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이 전시에서 나는 동일한 20개의 레이어를 112개의 캔버스에 변주한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다> (2022-2024) 회화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강박적인 회상에 가까운 과정을 통해 특정한 기억에 닿으려는 시도였지만, “No Point of Contact” 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결국 과거의 시간은 닿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떠나버린 소중한 대상들과 지금도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다 유독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과거와 현재가 나를 반대로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시간의 냉정한 경계 위에 서 있다고 느꼈고,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강렬한 감각적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과거에 멈춘 흔적들이 작업으로 옮겨지며 현재를 만나고, 두개의 서로 다른 시간 축이 화면위에 하나로 겹쳐지며 진동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기억을 반복하고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에서 빛나는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우리는 지나쳐온 시간을 어떻게 회고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올해 여름에 발표한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홀원, 2025)에서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욕망보다는, 깨진 벽면, 갈라진 바닥, 부식된 표면과 같이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흔적들을 조용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디지털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장소에서 찾은 흔적들을 작업에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여러 도시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바탕으로 패턴을 추출해서 이를 드로잉과 회화에 사용했다. 파편같은 과거의 흔적들이 모여 하나의 장면, 하나의 기억을 구성한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듯 흐릿하다가, 생각해보면 상세한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가, 결국 다시 어렴풋한 정서와 감각으로 흩어져버린다. 밀물과 썰물처럼 끝없이 생성되고 연결되는 상념들을 사슬처럼 화면에 엮는다. 이미지의 색상과 명도, 채도를 미묘하고 미세하게 조정해서 멀리서 봤을 땐 색의 덩어리가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선과 형태가 하나 둘 드러난다. 산산이 조각나고 부서진 시간의 편린을 성글게 모아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얽히며 고요히 진동하는 것 같은 감각을 전달하려고 했다. 붓을 들고 캔버스를 만날 때, 과거의 기록들을 다시 살펴보고 재해석 하고 내가 이해가능한 이미지로 조립할 때, 그 과정에서 나는 지나간 순간을 수용하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같기 도 하다.
매 시기별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짐에 따라 내 작업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가 경계가 닫힌 도형,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하드엣지 기법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실과 부재의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하드엣지라는 표현방식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동안은 기억이 디지털로 기록되며 데이터화 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하드엣지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단단한 외피로 감싸서 잃어버리는 것을 막고 싶은 표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속적인 색의 이어짐을 끊고, 쪼개고, 구획을 나누고, 하나의 단단한 테두리 안에 색을 안전하게 가둔다. 마치 그런 행위가 영원을 담보할 것 같기라도 한 것처럼. 쉽게 날아가버리는 연약하고 가벼운 것들을 얇고 견고한 막으로 감싸고, 설령 그 안에 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남아있는 단단한 테두리가 한때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거라고 위안한다.
Mine/Essay
2025/05/28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헤맬 때, 아직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던 시간을 상상한다. 처마 밑에서는 제비가 분주하게 아침을 알리고, 작은 아빠는 눈 덮인 무등산 산책로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고, 정원이는 에버랜드 그 어느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상상을. 아빠의 무릎은 유연하게 구부러져 산악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고, 잠시 쉬어갈 때면 나무에 기대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던 상상을. 아직 아무도 무엇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았던 순간을.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정원이는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우리는 에버랜드에 함께 놀러 갔다. 그곳에서 정원이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 흰 전구가 많이 켜졌던 흰 방에서 잃어버렸던 정원이를 다시 찾았다. 정원이가 죽은 날 엄마, 아빠는 급하게 광주로 내려갔다. 나는 혜정 이모와 함께 서울에 남았다. 컴컴하고 조용한 베란다 너머로 군데군데 가로등이 켜진 어두운 길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에버랜드에서 잃어버린 정원이를 다시 찾은 것처럼, 어디선가 정원이를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해 5월이면 연희 이모는 섬진강을 찾는다. 산기슭에 조용히 앉아 말없이 강을 바라본다.
3살 이전에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아빠는 두 무릎을 굽혀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사고를 기점으로 3살 이후의 사진에서 아빠는 한쪽 다리를 뻣뻣하게 편 채 내 뒤에서 그네를 밀어 주고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크면 아빠의 일직선 다리도 구부러질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올해는 아빠의 환갑이었다. 아빠의 머리엔 점차 흰색이 늘어가는데 아빠의 다리는 여전히 단단하게 땅과 수직을 이루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한 번 부서진 것은 영원히 부서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서진 파편을 껴안고 한 발, 또 한 발을 기우뚱기우뚱 나아갈 뿐이라는 것을.
아빠는 나를 비행기 격납고처럼 생긴 콘크리트 공장들이 배열되어 있던 장소로 데려갔다. 버섯농장을 지을 부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여기가 아빠의 꿈의 궁전이 될 거야.” 아빠는 말했다. 파이프들이 나름의 질서를 따라 격자무늬를 이루며 어지럽게 지나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이곳에 작업실을 차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스치듯 해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뒤, 아빠가 자신이 지었던 꿈의 궁전에서 쫓기듯 떠나야 했을 때 나는 벽에 걸린 캔버스를 바라보며 슬픈 안도를 느꼈다. 이 네모난 세계 속에 있는 내 꿈의 궁전은 안전할 거라고.
그 순간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 깨달음은 그때의 그 순간이 영원히 지나쳐버린 순간이라는 점에서,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온다. 눈이 많이 내렸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빠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작은 아빠와 함께 올랐던 무등산의 하얀 설원에서 뒤로 구두를 미끄러뜨리며 내려오던 작은 아빠와의, 내가 기억하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 그러하다. 그 순간이 유독 뇌리에 박힌 것은 그때의 그 겨울 무등산 산행 얼마 뒤 작은 아빠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까.
그 해 한여름의 베니스는 뜨거웠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민하와 매일같이 걷고 먹고 자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유하며 오랜만에 아주 깊은 연결감을 느꼈다. 여행이 끝나고 나는 베니스로, 민하는 다른 도시로 향했다. 헤어진 직후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베니스에 도착한 후 갑작스러운 공허가 엄습해 왔다. 어느 미술관에서 주황빛 색들에 눈이 부셨던 순간을 지나쳐 딱 그만큼 외로워진 찰나였다.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다 근처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나의 시간이 또다시 끝나버렸고, 무언가가 완전히 지나가버려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완결된 시간이 되었음을 생각했다.
미술관을 나서서 한 걸음 내디딘 길거리는 무덥고 찝찝한 습기로 혼탁했다. 하늘을 보기엔 너무 지쳤던 것 같아서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벽면이 깨지고 보수되기를 몇백 년 동안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균열의 흔적들, 물이 차오르고 빠지고를 반복하며 생긴 바닥의 물결무늬 흔적들. 한 시간을 통과하고 다른 시간이 막 시작되려는 시간과 시간의 틈 사이에 있었기 때문일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흔적들이 유독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Others/Critique
2025/01/28
이미지에서 데이터로, 그리고 회화로
김가은 (김가은미술사무소 대표)
캔버스 위에 각기 다른 투명도를 가진 여러 색의 물감이 겹겹이 쌓인다. 원이나 선과 같은 기하학적 조형 요소가 반복되며, 복제 가능한 디지털 공간을 연상시키는 화면을 구성한다. 추상회화작품에서 드러나는 수행성이나 물질성을 절제하고, 가까이서 직접 보지 않으면 디지털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화면을 균질하게 구성하여, 시각 외의 다른 감각들을 최소한으로 자극한다. 어떤 것이 지나간 흔적인지, 무엇인가 흔들리는 상태인지, 데이터로 치환된 특정 의미 단위인지 모호한 채로 이 조형 요소들은 경계를 흐리거나 혹은 반대로 강조하면서 화면 속을 부유한다. 물리적 현존성이 결여되고 비선형적인 시간성을 지닌 디지털 환경을 시각화한 캔버스 너머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포착할 수 있을까.
소실되는 기억에 대한 불안
설고은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느끼는 상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불안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을 데이터화하여 회화에 반영한다. 그의 기억은 과거의 사진이나 영상, 때로는 지인과의 문자메시지 내용 등을 매개로 구축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컴퓨터에 파일을 복사하여 저장하듯 파편화되어 흐릿해진 과거의 기억을 화면 속에 붙잡아 두려는 열망을 드러낸다.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 다>(2022-24)에서는 소통의 단절감, 디지털 알고리즘의 무의미한 반복성, 방향성을 잃은 수동 적인 태도,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또렷하지 못한 의식 상태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 은 20개의 레이어가 쌓인 112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것으로, 각 레이어에 컬러코드, 형태, 투 명도 등의 정보 값이 지정되어 있다. 복제성, 반복성, 투명성 그리고 광학적 효과 등 디지털 시각 이미지가 가진 특징을 강조하는 이 추상회화는 정교한 붓질과 에어브러시를 통해 작가의 시간과 손길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새겨놓는다고 할지라도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기란 쉽지 않다. 기억은 시각 이미지를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등 몸의 여러 기관을 통해서 감각된 것들이 다양한 감정과 함께 복합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에 가깝다. 망각하고 있던 이미지나 감 정이 특정 향기나 소리에 의해 소환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며, 그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편되는 가변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은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이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과거 사건의 재현이나 정보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던 관점, 그리고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 를 통해 기억은 경험한 모든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사건들을 새롭게 연결하고 재구성하 는 서사라고 표현한 부분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1)
설고은의 작업은 기억을 데이터화하고 이를 회화작품에 기록함으로써 소실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는 행위가 맥락을 잃은 기억 의 파편들을 구성하는 단편적인 정보의 축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기억을 되새기며 데이터화하여 재구성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기억이 소실될 시점을 한 번 더 유예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들을 처리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휴대폰 에 쌓아두고, 불필요한 문자메시지와 파일까지 모두 강박적으로 백업시켜 놓음으로써 경험과 기억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고 무심코 판단한다. 일상 속에서 경험들을 기록하고 저장하 는 활동, 어쩌면 때로는 기억 그 자체까지도 디지털 공간에 위임하고 있는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을 붙잡으려는 시도가 불가능할 것임을 알면서 작업을 지속하는 설고은의 추상회화를 마 주하면, 평범하게 스쳐지나 가는 일상의 기억이 가진 무게감을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정서적 공허
디지털 매체를 통해 멀리 떨어진 타인과 소통할 때 대면으로 소통할 때와는 다른 상태를 경험 한다. 아무리 서로의 일상을 촘촘하게 공유하더라도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과 같을 수 없 으며, 일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되어 결국 허무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다. 작가는 이 상태를 ‘기만적’이라고 표현한다. 디지털 매체는 즉각적이고 편리하여 상대방과 의 물리적 거리를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실제의 감각적 경험은 불완전하다. 완전한 연결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며, 이는 단순한 상대의 부재를 넘어서는 강렬한 정서적 결핍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방대한 양의 이미지와 데이터가 끊임없이 교체되며, 이전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의 흔적이 잔상으로 남는다. 특별한 행위를 수행하지 않아도 하나 의 이미지가 다른 하나로 대체되는 것은 너무나 흔하며, 원치 않는 이미지가 갑작스럽게 등장 하는 순간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의 교체는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 다. 설고은의 <로딩을 기다리는 중의 로딩을 기다리는 중의 로딩을 기다림>(2021)이나 <새벽 3시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보여줬다 재생했다 이어졌다 확산했다 연결했다 단절했다 다시 시작 한다>(2021)는 그러한 디지털 공간 속 움직임과 잔상을 시각적으로 포착한다. 이 작품들은 앞 서 소개한 작품과 시각적으로는 유사하게 여러 크기와 색깔의 네모나 불규칙적인 곡선 등의 조형요소들을 여러 겹 쌓아올려 심연을 알 수 없는 가상현실을 표현한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디지털 경험의 무의미한 반복성, 덧없음, 그리고 단절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디지털 공간에서의 경험은 종종 수동적이며 방향성을 잃기 쉽다, 이러한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주의력이 분산되고 무기력해진다. 이는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이론을 상기 시킨다. 그는 『사물과 비사물』에서 기술발전이 가져온 상황을 묘사하며, 정보라는 비사물이 기존에 중심적이었던 사물들을 몰아내고 환경을 장악하려하는 시대적 변화를 통찰력 있게 분 석했다. 플루서는 컴퓨터 메모리와 같이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비사물이라고 보았고, 비사물이 중심이 된 미래의 사회에서 손은 탐색도, 창조도 할 수 없게 되어 단지 잉여가 될 뿐이라고 경고하면서, 비사물적인 미래의 인간은 타자기나 피아노의 키를 누르는 손가락 끝 덕분에 현존할 것이라고 상상했다.2) 그 모습은 하루 종일 손가락 끝으로 휴대폰의 터치스크린을 쓸어올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현대인의 일상과 놀랄 정도로 맞닿아 있다.
디지털 공간과 그 너머의 회화
설고은의 작업은 동시대의 디지털 환경이 초래하는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빠르게 변화하고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인간의 인식체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는 연구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비물질적인 디지털 환경과는 대조적인,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물성을 지닌 회화를 매체로 선택했다는 점에 주목해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초기 작업이 디지털 시각언어가 회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과 함께 자라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인터넷 화 면의 지나치게 선명한 색상과 회화작품에서 나타나는 색감 사이의 괴리를 체감했다. 이러한 주제는 그가 작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치며 지금의 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God from the Machine>(2018)에서 그는 디지털 시각 매체의 특징을 보이는 선과 색으로 구성된 추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금속 소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 형상을 표현하여 구상과 추상이 혼재된 특성을 드러냈다. 이후 작가는 특정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재현적인 회화보다는 디지털 공간을 경험하며 생겨나는 혼란스러운 정서 그 자체를 표현하고자 구상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갔다. <Spaced I>(2019)에서 원, 사각형, 그리드 등 적극적으로 기하학적인 도형을 사용하여 디지털 가상공간을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최근 의 작업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그의 최근 작품들은 기하학적 도형을 비롯한 여러 조형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레이어들을 쌓는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usually summer>(2024)와 <aging simulator>(2024) 등의 작품에서는 물리적으로 축적되는 레이어의 시각적 효과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각 레이어들이 가지는 표현의 질감은 거칠기도 매끄럽기도 하며, 유광과 무광을 모두 사용하면서 두께 역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일관된 질서와 패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곳곳에서 균열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비교적 투명한 레이어를 통해 점멸하고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표현했다면, 최근 작업들에서는 좀 더 진하고 두터운 레이어의 색과 색 사이의 경계에서 발행하는 진동의 이미지를 표한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시한다.
디지털 시각 환경이 회화라는 전통매체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적극 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 회화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설고은의 작업은 다층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 전통매체인 회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동시에, 물질과 비물질, 가상과 실재, 영속과 소멸, 연결과 단절과 같은 주제들이 마치 레이어가 많은 그의 회화처럼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규칙적인 조형요소들과 그것의 균열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질서와 혼돈사이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데이터화된 이미지와 그것의 레이어가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그 속에 자리한 혼돈과 불안은 부유하고 진동하는 감각으로 전이되어 보는 이들이게 더욱 깊은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낸다.
1)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한병철,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 산북스, 2023, p. 83.
2) 빌렘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3, pp. 141-42.
Mine/Statement
2024/01/14
오랫동안 나를 관통하는 하나의 추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이별과 상실에 대한 불안이었다. 시간과 나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나는 시간의 단일한 움직임과, 그에 단단히 고정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을 망연히 지나치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하늘의 색이 바뀌고 낮과 밤이 바뀌고 때론 영원히 멈추고 싶은 순간들이 눈 앞에 펼쳐지지만, 결국 풍경은 스치고 사람은 떠나며 나는 속절없이 밀려가고 또 밀려간다. 앞으로, 또 앞으로. 꾹 참고 눌러놓았던 그리운 마음들이 쌓여 지나쳤던 감정들이 불쑥 찾아올 때면 작고 성긴 그물을 던진다. 현실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의흔적을 찾아,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이나 영상 또는 예전에 내가 올렸던 인터넷의 유물같은 포스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과 한때 가까웠고 중요했지만 이제는 건조해진 관계와 사람들에 대해 어렴풋이 회상하며 화면 위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정확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한 직감을 안고 화면 위에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네모나고 선명한 빛무리를 바라보곤 한다.
시간이 떠나간 자리엔 마음속의 풍경이 남지만, 풍경은 빠르게 풍화되어 뼈대만이 남는다. 대부분의기억에서 이 뼈대마저 이내 흐릿해지다 종국엔 소멸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나쳐왔음을 알지만 떠나보낼 수가 없어 자꾸만 배회하게 되는 몇몇 순간들이 있다. 이때의 풍경을 떠올리기 위해 여러번 반복해서 시도하지만, 뼈대를 둘러싼 세부적인 부분들이 매번 조금씩 달라지며 얼핏 유사하나 미묘하게 다른 풍경들이 탄생한다. 나무의 개수는 2개에서 4개로, 다시 3개로, 해의 위치는 정면에서 왼쪽으로, 또 맞은편으로. 시간속에서 스쳐 지나간 그 풍경과 꼭 닮은 것을 만들고 싶지만 잃어버린 그것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비슷한 풍경들을 무수히 많이 만들고 만다.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다>는 내가 부질없이그리워했던 어떤 한 순간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유튜브의 영상을,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나의 개인사진첩을 들쳐보던 기나긴 밤의 여정을 떠올리며, 원형적인 기억의 풍경에 도달하기 위한 밀물과 썰물처럼 끝없이 생성되고 연결되는 수 많은 시도들을 기억의 사슬처럼 엮어보고자 했다.
기억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의 역할을 하는 20개의 레이어는 모든 시도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기억을 재구성 할 때마다 핵심적인 키워드를 둘러싼 부분이 달라지는 것처럼 레이어의 크기와 위치, 개수가 매번 달라진다. 특정한 기억의 풍경에서 출발했지만, 보다 보편적으로 내가 감각하는 기억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사실적인 이미지를 배제한 추상의 방식을택하게 되었다.
작업에서는 기하학적 도형이나 선, 특히 딱 떨어지는 정확한 테두리가 안과 밖의 경계를 명확하게구분짓는 닫힌 도형만을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확정적이나 동시에 매우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기억의 재구성처럼, 선명하고 단호한 것들을 여러번 겹치고 엉키며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중간적인 상태를 만들고자 한다. 모든 기억의 풍경에는 외부세상과 그 세상을 감각하는 내가 있고, 캔버스의 네모난 질서에 맞춰 수직과 수평으로 안착하는 직사각형 도형들이 배경을 만든다면 꾸물꾸물 기어가는 선이 그것을 하나의 총체적인 덩어리로 엮는다.
기억의 뼈대를 따라 1번 레이어부터 마지막 20번 레이어까지 잃어버린 풍경을 착실하게 재구성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끝이 나면, 다시 새로운 캔버스에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한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가 늘어날 수록 그것과 닮은 풍경들이 늘어나 총 112개의 그림이 되었다. 자꾸만 기억을같게 또 다르게 되뇌이다보면 그 기억은 더욱 소중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서서히 잊혀지는 것일까. 112개의 시도들에 좌표를 부여해 이들이 전체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완결된 풍경들의 집합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시도에서 다음의 시도로, 또 그 다음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실패의 시도들이 계속해서 연결되며 좌표계를 확장해간다.
Mine/Statement
2022/06/10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매일이다. 아니다, 잠에 들기 싫은 밤이 계속이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사용한다. 아니다, 내게는 사용이라는 단어에 짙게 깔린 특정한 의도와 목적성이 부재한다. 작은 화면에 언어와 숫자, 이미지가 끝없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보지만 강렬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시공간의 구획을 벗어나 불쑥불쑥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무언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만 같은 것을 찾아 헤매인다. 아마도 그것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결핍을 애써 잊으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한 희망과 애잔한 마음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오른손 엄지로 화면을 기계적으로 스크롤 한다. 자동으로 켜지는 “Do Not Disturb” 기능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체의 연락을 차단해주고, 나는 소통을 자발적으로 거부한 채 누군가 디지털 세계에 남겨놓은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을 은밀히 지나친다. 대략 30초, 길어야 1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영상들과 단편적인 이미지의 조각들을 넘기고 또 넘긴다. 화면 위엔 계속해서 무언가가 떠오르고, 고정되지 않으며 표류하는 것들은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면, 화면에서 보는 이미지들은 내가 느낀 불안의 형태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다음날,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지난밤의 궤적을 따라가본다. 스치고 지나간 시각적 자극을 되짚어보지만 개별적인 이미지와 영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흐릿하다. 대신 빠르게 점멸하다 스믈스믈 이동하며, 부지불식간에 증식하는 것들에 대한 인상만이 떠오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들과 어둠속에서 핸드폰 화면의 네모난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희뿌연 빛무리에 대한 어렴풋한 잔상. 뭉게진 빛 덩이와 같은 잔상으로 남은 것들을 분해하고 해체하며, 그 속성을 분석하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다시 한번 조립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는 상상력에 고삐를 매어 현실의 중력에 단단히 옭아매기 마련이다. 화면 너머의 세계가 가진 비현실적인 공간성을 생각해보면, 이를 재구성하기 위해선 보자마자 무엇이 떠오르는 이미지들보다 기하학적 형상들과 추상 패턴이 역시 좋겠다. 얇은 파편들과 비슷한 조각들을 겹겹이 쌓아 길을 만들고, 이들을 곧 다른 크기와 색깔로 변주한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칠하고 흩뿌린 끝에 원점 (0,0)으로 사용될 하나의 캔버스가 완성된다. 이를 기준으로 위아래, 오른쪽과 왼쪽에 새로운 캔버스들을 연결해 동일한 규칙 아래 칠하고, 뿌리고, 겹치고, 잇고, 지우고, 연결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한다. 흐릿한 잔상과도 같은 이미지가 순환하듯 프레임 밖으로 생성되는 화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2019-2020년에는 화면 너머 무한한 가상공간이 화면에 디스플레이 되며 납작한 벽과 같은 평면공간으로 나타난 점에 착안한 작업을 했다. 화면 너머의 세계는 현실의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처음도 끝도, 중심도 가장자리도 없는 무한한 공간. 시스템과 논리회로에 의해 구축된 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들은 쉴 새 없이 나열되고 서로서로 충돌하며 무수히 겹쳐지고 나타나고 사라지며 스르륵 흘러간다. 이들은 본래 속한 세계 안에서는 든든한 무게감을 가지며 올록볼록 튀어나오지만, 그물에 잡혀 액정 위에 펼쳐질 땐 그 단단한 유리 평면 위에 찰싹 붙어 납작해진다. 나는 종이장처럼 평평해진 것들을 가지고 그들이 그물에 잡히기 전에 있었을 공간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화면 너머 내가 헤매던 공간이 무엇인지, 길을 정돈하고 구획을 나누며, 나의 흔적을 추적해 무의식에 자리잡은 시공간의 기억에 따른 서사를 되짚었다. <What I See in My Windows>시리즈에서는 공간을 구성하는 파편적인 정보들이 위로, 아래로, 양 옆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 <&>, <#>, <%>, <*> 를 원형으로 둥글게 이어지게 구성해서 처음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비선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2021년부터는 공간의 재구성보다는 기억 속에 남은 잔상에 집중하고 있다. 에어브러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해 각 이미지의 투명도를 다양하게 조절해 이미지가 쌓이고 겹치는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캔버스 하나하나가 모듈이 되어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고, 2차원 그래프의 벡터 시스템을 작품의 제목에 적용해 공간의 좌표를 부여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Others/Critique
2022/01/22
세 명의 미술가, 세 가지 평면: 인터페이스 / 소용돌이 / 펼치기
설고은 – 디지털 심리-조감도와 인터페이스로서의 회화
김예지, 독립 기획자
쉼없이 발광하던 모니터가 더 이상 무언가 보여주기를 중단하는 순간, 광택만이 남은 검은 유리위로 잔영이 아른거리는 때가 있다. 설고은은 이처럼 디지털 환경에서 지나친 섬광들이 눈자위에 남긴 잔상을 포착해 그린다. 작업은 화면에 몰아치던 ‘창’과 ‘탭’의 너울 사이에서 무엇을 봤는지 되새기며 시작한다. 빛무리 진 기억 저편 방울처럼 피어오르는 인상을 지켜보던 작가는 무수히 점멸하던 데이터의 잔흔이 기하 추상화되어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오름을 느꼈다. 스크롤의 조류를 타고 흘러 다니던 글과 그림으로부터 일어난 물거품은 감상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양과 색으로 솟아올라 작품의 구성단위가 되었다.
설고은은 정해진 수심없이 무한히 깊어질 수 있는 정보의 바다가 얄팍한 모니터에 눌린 평면으로 비치는 점에 주목한다. 〈Spaced〉(2019) 연작은 이러한 특징에 착안해 액정 디스플레이상 납작이 뭉개져 버린 대상들에게 볼륨을 부여하고, 회화적 공간에서 다시금 배치해 보려는 시도다. 전자 회로를 거치며 픽셀 단위로 부서져 스크린을 부유하던 현실 세계의 물질들은 여기서 재차 안료의 물성을 가진 기하학적 조형 단위로 변환되어 캔버스의 물리적 조건 위에 소생되었다. 이들은 직물의 저변을 파고 들어가는 환영적 공간 안에서 여럿으로 복제되며, 다양한 크기와 양감으로 조정되어 배열되고, 포개지고, 충돌과 조화를 거듭해 갔다. 붓질로 연성된 질량과 부피를 가지면서도 디지털 세계의 경험 방식으로 도식화된 회화는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시선으로써 유랑하던 가상공간의 충실한 유비가 된다.
인터넷 공간을 방랑하는 작가의 심리적 경험을 그곳의 지형지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회고에 담아 재구성하는 기제에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Internationale Situationiste 의 심리지리Psychogéographie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상황주의자들이 대로화된 도시의 획일성과 시각적 질서를 거슬러 자유롭고 유희적인 방황으로서 표류가 가능한 경로를 제시했던 것과 달리, 알고리즘의 감시 체제 아래 필터링 된 물살이 거세게 작용하는 네트워크 속을 유영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가르고 회피할 수 있는길이란 실상 요연하다. 결국〈위치없는 것들의 위치를 찾으려면 먼저 나의 위치를 알아야 하지만 내가있는지금이순간의 나의 위치를 알 수 없어 위치없는것들의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간다〉(2021)고 고백하는 설고은의 작업은 조류에 휩쓸려 다닐 뿐이던 인터넷 서핑을 마치고, 길 잃은 노정의 대강적인 조감도를 그려 보려는 사후적 노력에 그친다.
그러나 억압적인 가상 세계의 지리를 작가 개인의 감회에 의거해 변용하는 그의 그림은 회화적 환영을 통해 스크린 액정 너머의 실제 공간에서 지난 여정을 새롭게 접속하게끔 잇는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이에 작가는 최근 지나온 가상 공간을 대안적 내러티브로 다시금 관통하는 접속 장치로서의 회화를 고민하며 제어된 통신 경로를 선회하는 예리한 굴절각을 그려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 본디 인터넷 환경의 엄격한 통제와 지각의 현혹을 위해 활용되던 기술적 메커니즘을 회화적 표현 기법으로 전용하는 근래의 작업 방식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은은히 비치는 금속성 색채의 반사광과 에어브러시의 사용으로 붓자국 하나 남지않게 된 신작의 표면은 가공된 유리에 버금가는 매끈함을 자랑한다. 엷은 투명도로 그려진 색면들 역시 살짝씩 겹치며 퍼져 나가는 잔영의 산란을 디지털적인 유려함으로 구현해 내고 있다. 작품의 구성 또한 새로운 벡터를 만나 3×3 비율의 그리드로 분할된 캔버스가 각각 좌표를 가진 모듈로서 평면 그래프상에 배치되는 체계로 점차 프로그램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로딩을 기다리는 중의 로딩을 기다리는 중의 로딩을 기다림〉(2021) 이라는 이름처럼 무한한 루프를 그리는 화면 속 방향 상실을 체험케하는 설고은의 작품은 번듯이 구획된 사이버 도시공간에 일시적 정주와 우회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천편일률적인 경관 속 감춰진 경이를 향한 조우의 회로를 열어 줄 수 있다. 부지불식간에 디지털 그래픽과 규율에 만연히 노출되는 시대, 그것이 주관적으로 경험되고 회고된 양태를 재현하는 그의 회화는 그러므로 도처의 사이니지와 스마트 기기가 장악한 동시대 도시의 풍경까지도 생동하는 유람의 감각으로 해방 가능한 잠재력을 담지한다.
Mine/Essay
2020/12/09
변화를 맞닥뜨릴 때 이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수용한다 2) 거부한다. 하지만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기까지 말하지 못한 것들은 무엇일까? 1과 2 사이 의 무수한 소수? 1이 되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2? 혹은 1과 2 사이에 어정쩡하게 존재하는 1 또는 2?
나는 디지털 기기의 화면에서 무언가를 보는 경험이 회화를 둘러싼 시지각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흐름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를 마주하는 나의 태도를 곰곰이 반추해보면, 결국 나는 1도 2도 선택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나는 디지털 이미지의 선명한 미감과 다채로운 색상을 좋아하고, 날카롭게 떨어지는 미감을 동시대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디지털 이미지가 미처 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회화를 만들고 감상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점차 변화하고 때로는 완전히 대체되는 것을 시대의 필연적인 변화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한다. 매끄럽고 단단한 액정 위에 떠오른 이미지를 볼 때, 캔버스에 팽팽하게 당겨진 부드러운 천의 질감과 붓의 압력에 의해 뭉쳐진 물감의 두께와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이것이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 되고 액정에 매개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에 괜스레 마음이 쓰인다. 그러니 어쩌면 1과 2 중 하나를 다른 것의 우위 에 둘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구별이 무의미해질 만큼 점점 더 엉키고 설켜가는 현 상황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내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은 일견 관념적인 것으로, 이것이 기계적이고 차갑다는 것이다. 기계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처럼, 명확한 입력값을 바탕으로 작동하며 모호하 거나 애매한 값은 출력의 오류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입력한 그대로 출력이 되는 것을 보면 서 나는 디지털은 현실 세계의 지저분함, 예측 불가능함,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등과 반대되며, 자로 잰 듯한 정밀함,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엄밀함, 단순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내가 디지털 기술에 대해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실제로 접하는 디지털 가상공간은 흥미로운 정보와 이미지 들이 넘쳐나는 매혹적인 곳이다. 전세계의 이용자들을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나는 자발적인 참여자로서 나의 시간을 즐겁게 할애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화면 위에 무작위로 떠오르는 영상이나 이미지, 텍스트 는 예상치 못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하며, 뜻밖의 오류와 같은 것들이 발견되어 이미지가 깨지거나 엉뚱한 링크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결국 내가 디지털 가상공간에 대해 가진 인상은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공존하는데, 디지털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뼈대가 되는 기술은 기계적 정확성과 논리적 연산에 바탕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공간을 구성하는 대상은 유쾌하고 예기치 못하며, 엉뚱한 재미가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나는 일정한 규칙성과 기계적인 반복성을 가지면서도, 그 안의 대상들이 우연하게 관계하며 만들어내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공간을 표현하고자 한다. 주도면밀한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말이다. 나는 새로운 네트워크와 데이터가 추가됨에 따라 계속해서 팽창하는 디지털 가상공간의 확장성을 상상하고, 논리적이고 수리적인 방법에 의해 구축되는 구조를 떠올린다. 이 공간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은 공간을 둥둥 떠다니며 부유하며, 반복되고 변주되며 무수히 많은 이미지로 늘어난다. 이미지들은 공간을 구축하는 일종의 논리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지만, 동시에 예기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며 의외의 장소에 위치할 때도 있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위치에 갑작스럽게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Mine/Essay
2019/12/04
